맥아더 장군의 위대한 결심
6.25 전쟁 때입니다. 미국의 맥아더 장군이 전선을 찾았습니다. 북한군의 대규모 침략으로 한국군이 밀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없이 대대적인 후퇴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가 어느 벙커에 가보니 한국군 병사가 벙커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물었습니다. “전세가 이렇게 밀리고 있는데 왜 후퇴하지 않았느냐?”그가 대답합니다. “후퇴하라는 명령이 없었기 때문입니다.”감동을 받은 맥아더 장군은 그에게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병사가 소원을 말합니다. “나에게 충분한 양의 실탄을 주십시오.”맥아더는 전혀 뜻밖의 대답을 들은 것입니다. 장군이 기대한 것은 ‘철수명령을 내려주십시오’였습니다. 그런데 실탄을 넉넉히 달라니요. 이 말에 감동을 받은 맥아더 장군은 결심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전력을 다해서 이 나라 한국을 지켜야 한다.’그 후 인천상륙작전이 전개되었다고 합니다. (미암교회 정우목사 설교문에서 2019.2.10.)
<참고자료 추록>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요약
1880년 1월 26일 ~ 1964년 4월 5일
미국의 군인이자 정치가이며 사회운동가이다. 미국 육군사관학교를 거쳐 미국 육군참모대학교를 졸업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 한국 전쟁에 미국군과 연합군의 지휘관으로 활동하였다.
1937년 퇴역하고 필리핀 명예 육군 대장으로 추대되었다가, 1941년 미국 육군 대장으로 복귀한 후 1944년 미국 육군 원수 계급을 받아 진급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종결과 일본의 항복이 있은 후 일본에 주둔하다가 한국 전쟁을 지휘하였다. 한국 전쟁 당시 미국군 사령관으로 참전하였으며, 북한 인민군이 대구까지 밀고 내려왔으나,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인민군들을 남북으로 양분시켰다.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유엔군 총사령관에 취임하였다.
1950년 6월 26일 밤 10시 반경 이승만은 맥아더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하였다.6월 27일,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에게 "대한민국에 대한 해군 및 공군의 지원을 즉각 개시하라"고 명령했다.맥아더는 6월 29일 하네다에서 비행기를 타고 수원으로 와서 한강방어선지역을 시찰하고 워싱턴에 지상군 투입을 요청하였다.맥아더는 주일 미 제8군 사령관 월턴 워커 중장에게 “제24사단을 한국으로 이동시키라.”라는 명령을 하달(6월 30일)하였다.
인천 상륙 작전
당시 국군은 부산까지 후퇴해 있었고 백선엽 등이 다부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면서 부산 지역에 겨우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이때 맥아더는 인민군이 점령한 지역의 중심부를 타격하여 보급로를 끊는 계획을 세웠다.
맥아더는 1950년 6월 29일 전쟁발발 4일 뒤 미국 정부에, 한강방어선을 시찰하며 인민군의 후방에 상륙, 병참선을 차단하고 낙동강을 통해 반격에 들어간다는 기본 전략을 세웠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미 해군은 인천항의 간만의 차가 평균 7미터로, 항에 상륙하기 전에 월미도를 먼저 점령해야 하는데다 선단의 접안지역이 좁아 상륙 후 시가전이 불가피한 점 등의 이유로 상륙작전의 최악의 지형이라며 완강히 반대하였다. 해군 일부 인사들이 작전성공률이 5천대 1이라며 격심하게 반대하는 와중에, 맥아더는 이런 난점이 오히려 적의 허점을 찌르는 기습이 될 수 있다며 끝까지 인천상륙을 주장, 결국 8월 28일 미합참본부로부터 승인을 얻어냈다.
9월 15일, 작전개시일에 함정 206척, 7만여 명을 동원하여 영종도 근처에 집결, 작전이 시작되었다.
작전의 제 1단계는 월미도의 점령으로 시작되었다. 새벽 5시에 시작된 공격준비사격에 이어 미 제5해병연대의 3대대가 전차 9대를 앞세우고 월미도 전면에 상륙하였다. 월미도는 2시간만에 완전히 미군에 의해 장악되었다. 미군은 부상 7명의 경미한 피해를 입었으며, 인민군은 108명이 전사하고 106명이 포로로 잡혔다.
제2단계는 국군 제17연대, 미군 제7사단, 미군 제1해병사단의 주도로 인천반도 공격으로 이어졌다. 인민군 제18사단과 인천의 경비병력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간 미군 제1해병사단과 국군 해병 제1연대는 성공적으로 인민군의 주력이 규합할 시간적 여유를 빼앗아버리며 인천 장악에 성공하였다.
인민군이 38선에서 낙동강 방어선까지 진격하는데 81일이 걸렸지만, 인천상륙 이후 아군이 38선까지 돌아오는데 15일이 걸렸으니 적의 배후를 불의에 공격한 인천상륙작전의 크나큰 성과다. (위키백과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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